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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창조적 삶을 살아라

이름을 부르는 손 성경 본문: 창세기 1:26-28, 2:15, 2:19-20 아침의 책상 위에는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일들이 놓여 있다. 쓰다 만 문장, 고쳐야 할 기계, 심어야 할 작은 씨앗, 오래 생각만 해 온 계획, 누군가에게 건네야 할 따뜻한 말이 그러하다.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듯해도, 사람의 손을 기다리는 세계는 늘 남아 있다. 인간은 이미 만들어진 세상에 잠시 머무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어진 세계를 살피고 돌보며 그 안에 숨은 가능성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창세기의 첫 장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과 하늘과 땅과 생명을 지으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창조성은 이 절대적인 창조와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다. 하나님만이 무에서 있게 하시는 창조주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은 그분의 말씀과 뜻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땅을 다스리며 생물을 돌보라고 맡기셨다. 인간이 창조적이라는 말은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창조주의 선하신 질서에 응답하도록 지음받았다는 뜻이다. 아담이 부른 이름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신다. “아담이 각 생물을 어떻게 부르나 보시려고” 하셨다는 문장은 놀랍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이름을 이미 아시는 분이지만, 사람에게 이름 부르는 일을 맡기신다. 아담이 부른 이름이 곧 그 생물의 이름이 되었다는 기록은 인간이 피조세계를 함부로 소유하는 권세를 받았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자세히 보고, 서로 다른 존재를 구별하며, 그 고유함을 알아보는 책임을 받은 장면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무심히 스쳐 지나가지 않는 일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쉽게 도구가 되고, 숫자가 되며, 소비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면 한 존재의 자리와 차이가 드러난다. 창조적인 삶은 전혀 없던 것을 기발하게 만들어 내는 재능만을 뜻하지 않는다. 무뎌진 눈으로는 보지 못하던 것을 다시 보고, 이미 주어진 사물과 사람과 시간을 새롭게 이해하며, 혼돈 ...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하는 삶 성경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하박국 3:17-19 감사는 대개 풍성한 식탁 가까이에 놓인 말처럼 들린다. 일이 뜻대로 풀리고, 건강한 몸으로 아침을 맞고, 사랑하는 이들과 웃을 수 있는 날에는 감사의 이유를 찾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비가 오래 내리지 않아 들판의 색이 바래고, 기다리던 소식이 끝내 오지 않으며, 마음속 한 자리가 오래 비어 있을 때 감사는 너무 먼 언어처럼 느껴진다. 상실의 자리에서 감사하라는 말은 때로 아픔을 모르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삶에는 감사로 덮어 버릴 수 없는 슬픔이 있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쓸 때, 그 교회는 평온한 번영 속에 있지 않았다. 복음은 그 도시에서 환영만 받지 못했고, 성도들은 압박과 흔들림을 겪고 있었다. 편지 안에는 죽은 성도들을 향한 애도와, 오지 않는 듯한 주의 날을 기다리는 마음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감사는 고통을 모른 척하는 낙관의 언어가 아니다. 그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라고 말하지만, 그 기쁨의 바닥에는 환난을 통과한 믿음과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소망이 놓여 있다. 모든 일 때문에가 아니라, 모든 자리에서 “범사에”라는 말은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선하고 아름답다는 뜻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성경은 악과 죄, 죽음과 억울함을 선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께서도 고난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감사는 아픔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일이 아니라, 아픔이 마지막 이름이 되지 못한다는 고백에 가깝다. 모든 일 때문에 감사하라는 강요가 아니라, 어떤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끊어지지 않았기에 감사하라는 부름이다. 감사는 가진 것의 목록을 세는 습관만도 아니다. 물론 작은 빛과 한 끼의 음식, 누군가의 안부와 계절의 변화를 알아보는 마음은 귀하다. 그러나 성경의 감사는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감사는 내가 삶을 통제하고 ...

신앙칼럼, 성령충만을 받으라

  다른 취함으로 살아가는 밤 성경 본문: 에베소서 5:15-21, 갈라디아서 5:16-25 하루가 길게 저물면 마음은 자주 비어 있는 곳을 찾는다. 불안을 잠시 잊게 하는 말, 오래 누적된 피로를 덮어 줄 자극,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작은 도피처를 찾는다. 무엇인가에 기대어 자신을 잊고 싶은 밤이 있다. 사람은 꼭 술잔 앞에서만 취하는 것이 아니다. 칭찬에 취하고, 분노에 취하고, 욕망이 약속하는 빠른 만족에 취한다. 손에 쥔 것을 더 움켜쥐면 불안이 사라질 듯하고, 마음속 원하는 것을 얻으면 삶 전체가 충만해질 듯 여긴다. 그러나 그러한 취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대개 더 깊어진 공허와, 자신도 낯설어진 영혼만 남는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쓴다. 이 말은 단지 절제의 규칙을 세우는 문장이 아니다. 술에 취한 사람의 말과 걸음과 판단이 술의 지배를 받듯, 인간은 무엇에 마음을 내어 주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을 내어 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에베소는 번영한 항구 도시였고, 여러 신전과 종교적 열광, 상업의 욕망이 얽혀 있던 곳이었다. 바울은 그 도시의 성도들에게 무엇이 삶의 중심을 움직이고 있는지 묻는다. 그 질문은 오랜 세월을 지나 지금의 밤에도 여전히 들려온다. 비어 있는 마음과 채우시는 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사람이 자기 안에 특별한 열정을 만들어 내라는 뜻이 아니다. 본문에서 “충만함을 받으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그리고 외부로부터 채움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성령 충만은 인간의 감정이 고조된 상태나 일시적인 종교적 흥분과 같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자기 백성의 삶 안에 실제로 적용하시는 성령께서, 생각과 말과 관계와 선택을 새롭게 다스리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비어 있는 사람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힘으로 채울 수 없음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완성해 낸 강한 내면에만 찾아오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