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다리는 믿음의 인내
로마서 8장 18절부터 25절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해석하면서, 그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단언하며, 피조물 전체가 그 영광의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성도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소망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하며, 종말론적 시각에서 오늘의 삶을 바라보게 합니다. 특별히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성도는 고난 중에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정체성과 목적을 분명히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초월하는 영광의 무게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8:18)
바울은 고난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과 신학적 통찰을 담아 이 구절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생각하건대'(λογίζομαι)는 단순한 감정적 위로가 아닌, 이성적인 계산과 깊은 숙고를 통해 내린 결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난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난의 현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선포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로마 시대의 박해, 육체의 질병, 죄로 인한 내적 갈등, 세상의 불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은 단지 차이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무게와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화롭게 되는 그 날, 즉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전한 구원이 성취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성도의 부활, 온전한 회복,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모든 것을 포함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고난을 지나야만 도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피조물도 함께 고대하고 신음합니다 (8:19–22)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8:19)
바울은 고난의 현실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단지 인간 개인의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우주의 전 피조세계가 타락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고대한다'(ἀπεκδέχεται)는 단어는 목을 빼고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피조물도 마치 인격적인 존재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은 종말론적 사건, 곧 성도의 영화와 부활을 가리킵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으로 함께 부패에 굴복하게 되었지만(8:20),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영화롭게 될 그 날에 함께 회복되고 새롭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8:20)
이 구절은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을 암시합니다. 인간의 죄는 단지 인간에게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땅과 자연, 모든 창조 질서 전체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허무’(ματαιότητι)는 헛됨, 의미 없음, 무의미함을 뜻하는 말로, 피조물이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고통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1)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파괴, 생명의 유한함, 질병과 죽음—all of these—모든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도 장차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영광의 자유’에 이를 것입니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창조의 궁극적 회복을 가리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8:22)
바울은 다시 한 번 피조물의 현실을 강조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피조물은 탄식하고 고통합니다. 바울은 이 탄식을 ‘해산의 고통’에 비유합니다. 이는 고통이지만 절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고통입니다. 현재의 고통은 장차 올 회복을 예비하는 고통입니다.
성도는 소망으로 구원을 기다립니다 (8:23–25)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8:23)
바울은 피조물의 탄식을 넘어, 이제 성도들의 내면 탄식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첫 열매’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장차 받을 영광의 보증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속으로 탄식’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 됨’은 이미 이루어진 신분이지만, ‘우리 몸의 속량’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적 성취입니다. 이는 성도의 부활을 가리키며,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며 신음합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8:24–25)
바울은 구원의 본질을 ‘소망’으로 설명합니다. 구원은 현재적이고도 미래적인 복합적 성격을 지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시작되었고, 성령을 통해 확증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완전한 구원의 성취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소망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이 단지 감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참음으로 기다리는’ 인내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참음’(ὑπομονῇ)은 단순한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능동적인 인내,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며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끕니다. 소망이 우리를 붙들 때, 고난은 더 이상 우리를 삼키지 못합니다. 오히려 고난은 소망을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결론
로마서 8장 18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은 성도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소망 중에 인내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으며, 피조물조차도 그 영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도 몸의 속량, 곧 부활을 기다리며 신음하지만,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참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삶이 단순히 현실의 어려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영광의 여정임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로마서 8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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