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서 36절은 사도 바울의 깊은 신학적 탐구와 복음의 선포가 절정에 이른 후, 터져 나오는 찬양의 언어입니다. 이 구절은 복잡한 교리나 역사적 논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한 신앙인의 경외와 감탄으로 가득한 송영입니다. 그동안 펼쳐온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과 긍휼의 신비를 깊이 묵상한 끝에, 바울은 결국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찬양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깊은 신학적 성찰에서 비롯된 경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찬양하다
33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하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이 구절은 감탄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깊고도 풍성한지를 선포합니다. 여기서 ‘깊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βάθος (바토스)로, 측량할 수 없는 바다의 깊이를 연상시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속사의 계획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판단과 섭리가 인간의 사고로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 소피아)는 단지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는 차원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 속에서 가장 선한 길을 계획하시고, 목적하신 방향으로 인도해 나가시는 통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지식’(γνῶσις, 그노시스)은 단순한 정보의 총합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역사를 완전하게 아시는 전지성(全知性)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실패와 이방인의 구원, 그리고 궁극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 계획을 펼쳐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되돌아보며, 그 어떤 인간의 지혜로도 이 하나님의 뜻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깨달음 앞에 찬양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하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는 말에서 ‘판단’과 ‘길’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의미합니다. ‘측량치 못한다’는 말은 원어로 ἀνεξερεύνητος (아넥세레우네토스), 곧 ‘철저히 조사하거나 연구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고, ‘찾지 못한다’는 표현은 ἀνεξιχνίαστος (아넥시크니아스토스), 즉 ‘발자취를 추적할 수 없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높고 심오한지를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려 애쓸 수는 있으나, 그 전체를 파악하거나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낸 자가 없습니다
34절에서 바울은 구약 성경, 특히 이사야 40장 13절과 욥기 41장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하는 신학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즉 계획과 뜻을 인간이 미리 알아내거나 조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충고하듯 기도하거나, 내 뜻대로 하나님이 움직여 주시기를 기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이나 논리에 의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 스스로의 목적과 주권에 따라 일하시는 분임을 선포합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카운슬러, 즉 조언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 표현은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계획을 주도하거나 간섭할 수 없음을 뜻하며, 오직 하나님 홀로 주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드러냅니다.
35절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욥기 41장 1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과 자족하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먼저 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 진리는 은혜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줍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자격도, 그에 상응하는 공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무상의 선물이며, 우리가 그에 대해 어떤 보상이나 거래를 할 수 없는 완전한 선물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완성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 때도, 그것은 대가가 아닌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36절은 이 송영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구절은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을 이루는 말씀이며,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첫째, “주에게서 나오고”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선언처럼,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며, 그 어떤 존재도 스스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둘째, “주로 말미암고”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단지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그 모든 피조물을 붙들고 운행하시며, 역사 속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 말씀과 연결되는 고백입니다.
셋째,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표현은 만물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종말론적 고백입니다. 모든 창조물과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 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한 윤회나 순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분명한 목적지를 향한 직선적이고 종말론적인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서 ‘세세에’는 헬라어 εἰς τοὺς αἰῶνας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로, 영원 무궁토록이라는 뜻입니다. 이 고백은 우주적이며, 동시에 개인적인 찬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바라본 신자의 응답은 오직 영광을 돌리는 예배뿐입니다.
결론
로마서 11장 33절부터 36절은 구속사의 깊은 신비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앞에 서 있는 자가 반드시 고백하게 되는 찬양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하나님의 계획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의 지혜와 지식은 언제나 선하고 완전하며, 그 판단은 오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먼저 드릴 수 없는 존재이며, 오직 그분의 은혜로 모든 것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가 되어야 하며, 모든 존재와 역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로마서 전체를 마무리하며, 우리로 하여금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 꿇게 만듭니다.
로마서 11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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