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가 아니라 오직 택하심으로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기준이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로마서 9장 10절부터 13절은 에서와 야곱의 예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본질과 목적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선택은 불공정하거나 편애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구속사의 신비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오늘 강해는 6-29절까지의 내용을 좀더 세분화하여 강해한 것입니다.
로마서 9:6–29 강해,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선택은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진다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사례를 넘어 이제 리브가의 태중에 있던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로 나아갑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롬 9:10).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첫 번째 사실은, 이 두 아이가 동일한 아버지,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점입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 어머니가 달랐기 때문에 혈통적 조건의 차이가 있었지만, 에서와 야곱은 완전히 동일한 조건 속에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쌍둥이 중 하나를 택하시고, 하나를 버리셨습니다.
이 선택은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롬 9:11).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은 그가 무엇을 잘했기 때문도, 에서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둘 다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떤 선도 악도 행하기 이전이었습니다. 이 말은 선택의 기준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철저히 인간의 조건과 행위를 배제하며,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주권에만 두고 있습니다.
이 선택의 시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선악을 분별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공평에 대한 개념을 뒤흔듭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공의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형평성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선택은 그분의 거룩한 뜻과 선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행위가 아닌 은혜를 따른다
이 절정은 11절 후반부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여기서 '택하심'(ἐκλογή, 에클로게)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에 의한 예정된 선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οὐκ ἐξ ἔργων, 우크 엑스 에르곤),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ἀλλ᾽ ἐκ τοῦ καλοῦντος, 알 데크 투 칼룬토스)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대조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행위는 배제되고, 오직 하나님이 부르시는 주권적 행위만이 선택의 기준이 됩니다. 이 부르심은 단지 외적인 초청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와 반응을 일으키는 유효한 부르심(efficacious calling)을 뜻합니다. 개혁주의 교리는 이 부분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선택은 은혜이며, 인간의 선행이나 신앙의 가능성을 보고 내리는 결론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진 신비로운 선물입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립니다. 나의 구원이 나의 결정이나 나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높일 수 없습니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우리가 받은 구원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주어진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결코 희석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의 전 과정을 통틀어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바울은 13절에서 결정적인 선언을 인용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말씀은 말라기 1장 2-3절에서 인용된 구절로, 단순히 개인의 감정이나 혐오의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하고'(ἠγάπησα, 에가페사)는 언약적인 사랑, 곧 선택의 사랑을 의미하며, '미워하였다'(ἐμίσησα, 에미세사)는 언약에서 제외되었다는 구속사적 표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불러들여진 자이며, 에서는 그 언약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자로 설정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더 나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창세기를 보면 야곱도 결코 흠 없는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간사하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고, 그 선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를 다시 각인시키고자 했습니다. 바울 역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구원은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교회 공동체를 향한 경고이자 위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이며, 그분의 언약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은혜가 얼마나 거저 주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결정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절은 또한 복음의 확장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단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민족, 문화, 배경을 뛰어넘어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을 부르시며, 그들 안에서 구속사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십니다. 이 진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큰 확신을 줍니다. 복음은 인간의 설득력이나 환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기로 작정한 그 현장에서 능력으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로마서 9장 10절부터 13절은 하나님의 구원이 철저히 주권적이며 은혜에 기초한 것임을 선포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사례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기준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른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 서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앞에 늘 겸손히 서야 하며,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그분께 응답해야 합니다.
로마서 9장 구조
'신약성경 > 신약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롬 9:19–29 긍휼의 그릇 (0) | 2025.04.03 |
---|---|
로마서 9:14–18 하나님은 불의 하신가? (0) | 2025.04.03 |
로마서 9:6–9 약속의 자녀 (0) | 2025.04.03 |
로마서 9:6–29 강해,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0) | 2025.04.03 |
로마서 9:1–5 강해 이스라엘은 구원 받는가? (0) | 202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