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도피와 벧엘의 길
야곱의 도피와 벧엘의 길|도망치는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들어가는 말
창세기 28장의 야곱은 믿음의 영웅처럼 당당히 길을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형 에서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뒤, 형의 분노를 피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도망가는 사람입니다. 그의 길은 약속을 향한 순종의 길이기도 하지만, 먼저 자신의 죄와 두려움이 만들어 낸 도피의 길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야 했고, 어머니 리브가와도 작별해야 했으며, 익숙한 땅과 가족의 보호를 뒤로한 채 낯선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 도피의 길 한가운데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야곱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돌을 베고 잠들었지만, 하나님은 그가 누운 자리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곳이 거룩한 장소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길을 잃은 사람보다 먼저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벧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벧엘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특정 장소에만 갇혀 계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향을 떠난 야곱, 불안과 죄책감 속에서 잠든 야곱, 아직 변화되지 않은 야곱의 길 위에 임하셨습니다. 벧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간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장 낮고 어두운 자리로 내려오신 장소입니다.
야곱의 벧엘 길은 우리의 삶을 비춥니다. 우리는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길을 떠날 때도 있고, 관계의 상처와 실패, 불안한 미래 때문에 도망치듯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외면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죄인에게서 등을 돌리지도 않으십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도망치는 야곱을 붙드시고, 그를 이스라엘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죄와 두려움의 길
야곱은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으로 얻어 냈고, 나아가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창 25:29-34, 27:1-29). 야곱이라는 이름에는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이미 말씀하신 약속, 곧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했습니다(창 25:23).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의 꾀로 붙잡으려 했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받은 뒤 야곱은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뒤 야곱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며,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합니다(창 27:41-45). 야곱은 축복을 얻었지만 집을 잃었고, 장자의 자리를 얻었지만 형제 관계는 깨졌으며, 약속을 붙잡으려 했지만 외로운 도피자가 되었습니다.
죄는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은 축복을 얻었지만, 그 축복을 기뻐할 여유를 잃었습니다. 거짓으로 얻은 것은 마음의 평안을 주지 못하며,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확보한 안전은 더 깊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야곱의 길은 죄가 단순히 법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으로 삶을 통제하려는 태도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야곱의 도피는 하나님 약속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길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 길을 구속의 여정으로 바꾸십니다. 이는 야곱의 죄가 정당화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오래 훈련하시고, 그가 뿌린 속임의 열매를 스스로 맛보게 하십니다. 하지만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납니다.
돌베개 위의 밤, 아무것도 없는 자리
야곱은 길을 가다가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져서 그곳에서 유숙하게 됩니다. 그는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잠을 잡니다(창 28:10-11). 이 장면은 매우 간결하지만 깊은 쓸쓸함을 품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제 아버지의 장막과 어머니의 돌봄, 형제와 종들이 있는 집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길가의 돌과 밤의 어둠뿐입니다.
성경은 야곱이 얼마나 가난해졌는지를 과장하지 않지만, 돌베개는 그의 처지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이전까지 아버지의 집에서 축복을 두고 경쟁하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자기 머리를 둘 부드러운 자리조차 없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꾀로 미래를 붙들려 했던 사람이, 이제는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는 길 위에 홀로 누워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인간이 자기 힘을 믿을 수 없게 된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이것은 고난 자체가 언제나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곱의 외로움에는 분명 그의 죄가 만든 결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결과 속에서도 야곱을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돌베개 위의 밤은 야곱의 인생이 끝났다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시는 은혜의 밤이 됩니다.
우리도 삶에서 돌베개 같은 시간을 경험합니다. 더는 기대할 곳이 없고, 익숙한 관계가 무너졌으며, 내 지혜로는 앞으로의 길을 알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이야기는 가장 불편하고 초라한 자리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거룩한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야곱은 잠든 가운데 땅에 세워지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 또는 층계 같은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또는 그 곁에 서셔서 말씀하십니다(창 28:12-13). 히브리어 술람(סֻלָּם)은 일반적으로 사닥다리로 번역되지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계단이나 경사로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구조물의 정확한 모양이 아닙니다. 야곱이 본 환상은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와 삶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야곱은 길 위에 버려진 사람처럼 누워 있었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일을 통해 그의 삶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천사들의 오르내림은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올라갈 사닥다리를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사닥다리는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이며,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은 복음의 구조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자신의 선행과 지혜, 종교적 열심으로 하늘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내려오시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길을 마련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51). 이는 벧엘의 환상을 분명히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잇는 참된 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사닥다리를 보았지만, 우리는 그 사닥다리가 가리키는 분,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벧엘에서 다시 들려온 언약의 말씀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이 누워 있는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의 자손은 땅의 티끌처럼 많아지고, 동서남북으로 퍼져 나가며, 땅의 모든 족속이 그와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창 28:13-14).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이삭에게 확인하신 약속의 반복입니다. 야곱은 속임수로 축복을 얻었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적 행위에 근거하여 언약을 유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적 신실하심 때문에 야곱을 붙드십니다. 야곱은 자격이 있어서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은혜로 부름받고 은혜로 빚어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창 28:15). 이 약속은 야곱의 삶 전체를 붙드는 말씀입니다. 그는 하란에서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고, 가족 안에서 갈등을 겪으며, 에서를 만나는 두려움과 얍복의 씨름을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벧엘에서 하신 말씀대로 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약속은 모든 길이 편안하리라는 보장이 아닙니다. 야곱의 길에는 여전히 고난과 결과, 눈물과 갈등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고난의 부재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에게 필요한 가장 깊은 위로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시며,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실 때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야곱은 잠에서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두려워하며 “이곳이 어찌 그리 두려운 곳인가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합니다(창 28:16-17).
야곱의 놀라움은 하나님이 벧엘이라는 특정 장소에만 계신다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삶의 이 낮은 자리에까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벧엘은 이전까지 특별한 성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임하심으로 그 평범한 길가의 장소는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예배 이해를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며, 특정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물론 공동체 예배와 성전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병실과 일터, 낯선 도시와 외로운 밤, 실패와 도피의 길에서도 자기 백성을 만나십니다.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는 야곱의 말은 신앙의 전환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낄 때가 많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먼저 그 자리에 계셨음을 나중에 깨닫기도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감정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돌기둥과 벧엘이라는 이름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루스에서 벧엘로 바꿉니다(창 28:18-19). 돌은 전날 밤 그의 외로움과 불편함을 상징했지만, 아침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기념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야곱이 머리를 베고 누웠던 바로 그 돌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처와 실패, 두려움의 기억까지도 은혜를 기억하는 표지가 되게 하실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과거의 고통이 그 자체로 아름답거나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을 헛되게 버려두지 않으시며, 그것을 통과한 자리에서 우리를 더 깊은 믿음으로 이끄실 수 있습니다.
벧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의 기억을 새롭게 합니다. 그는 앞으로 긴 세월 동안 하란에서 라반을 섬기고, 가족의 갈등과 재산의 문제를 겪으며,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다시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그러나 벧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의 출발점으로 남습니다.
우리에게도 벧엘의 기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붙드셨던 때,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자리에서 길을 열어 주셨던 때, 죄와 낙심 가운데서 다시 일어서게 하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은 과거의 감동을 붙들고 사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동일하게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야곱의 서원과 아직 자라야 할 믿음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셔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자신이 세운 돌기둥이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창 28:20-22).
이 서원을 읽을 때 야곱이 하나님과 거래하려 했다고만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응답하고,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려 합니다. 십일조를 약속한 것은 자신이 받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야곱의 말에는 아직 미성숙한 믿음의 흔적도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무조건적 약속 앞에서,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면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조건처럼 들리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지만, 하루아침에 완성된 사람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미성숙한 고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를 오랜 세월 다루시며, 받기만 하려는 사람을 하나님께 매달리는 사람으로, 속이는 사람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믿음은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출발점이며, 그 경험은 일상의 순종과 회개, 기다림과 성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란의 세월,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하다
벧엘 이후 야곱은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라헬을 사랑하여 칠 년을 섬겼지만, 결혼식 날 라반은 언니 레아를 대신 들여보냅니다. 야곱은 다시 칠 년을 섬겨야 했고, 이후에도 품삯과 재산을 두고 라반의 속임과 갈등을 겪습니다(창 29:15-30, 31:7).
야곱은 과거에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하란에서 그는 자신보다 더 능숙한 속임수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이는 단순한 인과응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의 성품을 다루시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지만, 그가 자기 꾀를 의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도록 오랜 시간을 사용하십니다.
벧엘의 약속은 하란의 고난을 면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벧엘의 하나님은 하란에서도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돌보시고 재산을 얻게 하시며,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창 31:3).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도 삶이 어려워지면 약속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상처와 실패를 통하여 우리 안의 교만과 자기 의지를 다루십니다. 벧엘의 약속은 고난의 면제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버림받지 않는다는 보증입니다.
다시 벧엘로 돌아가라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에서와 화해하며, 가나안 땅에 돌아온 뒤에도 여러 고난을 겪습니다. 세겜에서 딸 디나가 큰 상처를 입고, 아들들은 폭력으로 보복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창 35:1).
야곱은 가족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의복을 바꾸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창 35:2-7). 벧엘로 돌아감은 단순히 과거의 감동을 되찾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정결하게 하며, 처음 받은 약속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다시 야곱을 축복하시고, 그의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재확인하십니다(창 35:9-12). 야곱은 속이는 자라는 옛 이름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과 씨름한 이스라엘로 새롭게 불립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과거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과거를 통과한 사람을 새 이름과 새 사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에게도 벧엘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이 복잡해지고 관계와 소유, 욕망과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할 때, 우리는 처음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벧엘로 돌아간다는 것은 감정적인 추억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우상을 버리고 말씀 앞에 다시 서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참된 벧엘과 하늘의 문
야곱은 벧엘을 하나님의 집과 하늘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를 보았고,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신약은 이 환상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 예수님은 야곱이 본 사닥다리의 기능, 곧 하늘과 땅을 잇는 중보의 길을 자신 안에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는 인간의 종교적 노력으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이시며, 참된 하나님의 임재이십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참된 성전이십니다. 야곱은 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지만,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야곱의 도피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길로 완성됩니다. 야곱은 죄 때문에 집을 떠났지만, 예수님은 죄인들을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야곱은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를 보았지만, 예수님은 친히 길이 되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늘의 문”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시는 구주이십니다.
오늘의 신앙적 교훈
죄의 결과를 정직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도 자기 방식으로 축복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의 도피는 죄의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말하면서 거짓과 조작, 자기중심적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붙드셨지만, 우리는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도피의 길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찾아 벧엘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도망치다가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보다 먼저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실패와 낙심, 외로움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돌베개 같은 시간을 은혜의 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야곱의 돌베개는 외롭고 불편한 밤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돌 위에서 야곱에게 하늘의 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가장 힘든 자리에서도 우리를 만나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시고,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야곱의 길을 쉽게 만들지 않았지만, 그 길을 끝까지 견디게 했습니다. 성도의 안전은 환경의 완전한 안정에 있지 않고,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삶의 예배로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돌기둥을 세우고 벧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순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감사와 예배로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벧엘로 돌아가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야곱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가족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명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정리와 회개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마음속의 우상, 곧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하늘의 길을 믿어야 합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와 공로로 하나님께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길이 되셨기에, 누구든지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맺는말
야곱의 벧엘 길은 죄 없는 사람이 영광스러운 사명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속임수와 두려움, 외로움과 도피 속에 있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돌을 베고 잠들었지만, 하나님은 하늘을 여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승인하지 않으시지만, 실패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야곱을 하란의 긴 세월과 얍복의 씨름, 벧엘로의 귀환을 통하여 이스라엘로 빚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참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도피의 길 위에 있는 사람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돌베개 같은 밤에도 하나님은 가까이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길을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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