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빚은 갚지 말고 계속 지라
로마서 13장 8절은 바울이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원리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응축해서 제시하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이 아닙니다. 율법을 넘어선 은혜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자가 어떤 자세로 이웃과 관계 맺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복음의 삶의 모델입니다.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빚’으로 표현하는 이 말씀은, 복음을 받은 자는 누구나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있다는 영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성도의 지속적인 빚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을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빚’은 헬라어 ὀφείλετε (오페이레테)에서 나온 말로, ‘의무’, ‘채무’를 뜻합니다. 보통 빚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반드시 갚아야 하는 부담이자 의무로 인식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빚’이라는 개념을 ‘사랑’과 연결시킵니다. 사랑은 성도가 절대 끝낼 수 없는, 계속해서 갚아야 할 거룩한 채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모든 종류의 채무를 회피하라는 의미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성도가 신실하게 빚을 갚아야 하고, 재정적 의무를 감당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느냐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이웃에 대해 우리가 지속적으로 져야 할 유일한 채무가 바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세상은 관계에서 주고받는 것이 균형을 이룰 때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먼저 받은 사랑을 근거로 계속해서 주는 사랑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이 사랑을 이웃에게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단회적 행위가 아니라, 일생을 두고 갚아야 할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결코 다 갚을 수 없는 ‘빚’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인이었고, 원수였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는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사랑에 빚진 자요, 이제는 그 빚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갚아나가야 할 자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강력한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기준이자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장에서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사랑이 율법의 실체요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이루었다’는 표현은 헬라어 πεπλήρωκεν (페플레로켄)으로, ‘완성되었다’, ‘충족되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단순히 율법의 조항을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이 지향하던 목표와 목적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이웃을 해치지 말고, 속이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존중하라는 조항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사랑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실제로 행하는 자는 이미 율법이 추구하던 그 완성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는 도구이며, 성령 안에서 새롭게 된 자가 기쁨으로 지키는 삶의 기준으로 이해합니다.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을 인도하는 규범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대신하여 사랑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깊은 본질이 사랑임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을 무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이행하는 실체인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적인 친절함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적 헌신이며, 상대의 유익을 먼저 고려하는 행동이며, 때로는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희생입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율법의 정신이고,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삶의 본질입니다. 율법을 문자로만 지키는 사람은 쉽게 정죄하고 자기 의를 세우게 되지만, 사랑으로 율법을 살아내는 사람은 겸손과 자비로 이웃을 품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 이루는 삶의 변화입니다.
계속해서 사랑의 빚을 지라
이 말씀을 받은 우리는 ‘사랑의 빚’을 단지 한 번 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지 물질적 채무를 경계하라는 말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강력한 초대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거래의 논리로 작동합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대하니까 나도 이렇게 하겠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던 말씀은, 바로 이 사랑의 빚을 인식하라는 초청입니다.
사랑은 단지 선택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새롭게 져야 하는 의무입니다. 이것은 부담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직장과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사랑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작은 배려 하나, 용서 하나, 인내 하나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빚은 매일 갚아야 하고, 끝날 때까지 갚아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혜는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결론
로마서 13장 8절은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단지 감정이나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복음을 받은 자가 반드시 지고 살아가야 할 빚입니다. 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거룩한 삶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신에게 묻고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사랑의 빚을 잘 갚았는가?” 이 질문이 우리 삶을 이끌고, 우리 공동체를 회복시키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끝까지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이며, 복음을 받은 자의 본질입니다.
로마서 13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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