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21–23 강해
내 안에 작동하는 두 법의 충돌
로마서 7장 21절부터 23절은 인간 존재 안에 자리한 두 개의 강력한 영적 원리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로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악이 자신 안에서 역사하는 현실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심리적 딜레마를 넘어서서, 성도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죄의 세력과 그 죄에 저항하려는 속 사람의 갈망 사이의 실제적인 영적 전쟁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가 자기 삶 속에서 공감하게 되는 실존적 갈등이며, 성화의 긴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깊은 위로와 교훈을 줍니다.
내 속에 있는 악의 현실 (7:21)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1)
바울은 자신 안에서 발견한 하나의 '법'(nomos, νόμος)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법'은 율법이나 규범적 명령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 혹은 작동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신이 선을 행하고자 할 때마다 악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관된 원리를 발견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선한 동기와 결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의 자리에서는 악이 늘 끼어들어 그 의도를 왜곡시키거나 좌절시킨다는 뜻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는 거듭난 속 사람, 곧 성령으로 중생한 자아입니다. 그 자아는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악이 함께 있는 것'은, 바로 그 속 사람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잔재, 즉 육신의 죄성이 끊임없이 방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화의 현실을 직면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라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은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으며, 죄는 언제든지 다시 자리를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며, 이 싸움은 단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법칙의 충돌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강조합니다.
속 사람의 기쁨과 지체 속의 반역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2)
'속 사람'(ὁ ἔσω ἄνθρωπος)은 바울 신학에서 중생한 존재, 즉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된 자아를 의미합니다. 이 속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즐거워한다'(συνήδομαι)는 단순한 동의나 인정이 아니라, 기쁨으로 그 법을 사랑하고 따르려는 깊은 내적 성향을 나타냅니다. 이는 성령께서 주신 변화이며,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은혜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신자의 본질적인 방향성이 변했음을 증언합니다. 성도는 죄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대해 기쁨으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 고백은 곧이어 나올 깊은 내면의 갈등을 더욱 뚜렷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이처럼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속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화가 단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비롯된 내면의 변화이며, 그 변화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여정임을 보게 됩니다. 속 사람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곧바로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직 우리 안에는 죄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 흔적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려는 성향으로 작동합니다.
죄의 법과 마음의 법의 충돌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7:23)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내 지체 속의 다른 법’은 죄의 본성, 즉 사르크스(sarx, 육신)의 죄성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인 몸이 아니라,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전인격을 포함합니다. 이 법은 ‘마음의 법’,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내적 원리와 지속적으로 충돌합니다.
'싸운다'(ἀντιστρατευόμενον)는 전쟁 용어입니다. 이는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죽고 죽이는 실질적인 전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전쟁이 실제로 자기 안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깨달음의 수준을 넘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때로는 자신이 '사로잡히는'(αἰχμαλωτίζοντα) 경험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군사용어로, 포로로 붙들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바울이 때때로 죄의 세력 앞에서 무기력해지고 넘어지는 자신을 경험했음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죄가 여전히 너무도 강력하다는 사실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이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성도는 죄를 이기며 살아가야 하지만, 그 과정은 치열한 전쟁이며, 때로는 넘어지고 좌절하는 경험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싸움 자체가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이며, 그 갈등이 죄를 거부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싸움이라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내적 전투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진실하게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붙잡고자 합니다.
결론
로마서 7장 2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은 신자의 삶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속 사람을 지녔지만, 동시에 우리 지체 속에서는 여전히 죄의 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법 사이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 갈등은 신자가 진정으로 거듭났다는 증거이며, 그 싸움의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말고, 이 싸움 속에서도 은혜를 더욱 갈망하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지해야 합니다.
로마서 7장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