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7-12 하나님의 섭리 속에 감추어진 이스라엘의 실족
하나님의 섭리 속에 감추어진 이스라엘의 실족
로마서 11장 7절에서 12절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단순한 역사적 실수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안에서 이해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하지 못하고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면서도, 그 실패조차 이방인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깊은 지혜의 일부임을 선포합니다.
선택받은 자와 완악하게 된 자의 구분
7절 말씀은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다루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구했던 것은 ‘의’이며, 그 의를 율법을 통해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택하심을 입은 자”(ἐκλογὴ, 에클로게)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의미하며, 이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정해진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우둔하여졌다”(ἐπωρώθησαν, 에뽀로데산)는 표현은 단순히 지적 능력의 저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돌처럼 굳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영적 무감각과 강퍅함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완고하게 닫혀버린 상태라는 것을 묘사합니다. 즉, 복음이 들려져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 자기 의에 갇혀 거부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주권적으로 이끄시지만, 동시에 인간의 완악함이 심판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신비로운 교리를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대로 택하신 자를 은혜로 구원하시되, 거부하는 자들의 강퍅함조차도 구속사 속에서 사용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
바울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단순한 사회적 현상으로 보지 않고,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로 해석합니다. 8절에서는 신명기 29장과 이사야 29장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혼미한 심령’(πνεῦμα κατανύξεως, 프뉴마 카타뉵세ως)이라는 헬라어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곧 ‘깊은 잠에 빠진 영’ 또는 ‘마비된 심령’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종의 심판의 방식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의 눈을 가리시고 귀를 닫으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의로 진리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 판단을 내리시되, 그 심판마저도 구속사 안에서 일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9절과 10절에서 바울은 다시 다윗의 시편을 인용합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시며”라는 구절은, 그들이 신뢰하고 자랑하던 율법 자체가 오히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밥상은 본래 풍요와 만족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밥상이 오히려 올무가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율법과 전통 안에서 안주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 상태를 말합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참된 생명의 길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심판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의 무서운 측면을 보여줍니다.
실패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깊은 계획
11절과 12절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구속사의 비밀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족이 영원한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넘어졌지만 완전히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오히려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방인의 구원은 다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심을 불러일으켜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섭리를 이루어 갑니다.
여기서 사용된 “시기하게 함”(παραζηλῶσαι, 파라젤로사이)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가졌을 때 느끼는 갈망’의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임한 구원을 보고 마음에 갈망을 느끼게 하심으로 다시금 복음 앞에 서게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여전히 회복의 대상으로 보고 계시며,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12절은 더욱 깊은 신학적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에게 영적 유익이 되었듯,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얼마나 큰 축복이 전 세계에 임하겠느냐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단지 민족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이는 온 인류 구속사에 연결된 중요한 지점이며,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맞닿아 있는 사건입니다.
결론
로마서 11장 7절에서 12절은 이스라엘의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드러냅니다. 인간의 완악함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속에서 사용되며, 구속사는 늘 그 실패와 연약함을 딛고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마주하게 되며,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다시금 고백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조차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고, 그 구원은 결국 다시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 더 큰 영광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우리도 겸손히 서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