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신약로마서

로마서 9:14–18 하나님은 불의 하신가?

BibleMeditation 2025. 4. 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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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긍휼과 완악함, 주권 앞에서의 침묵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명하며, 우리 안에 당연히 생겨나는 의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고 누구를 완악하게 하신다면, 그분은 불공정하신 것이 아닌가? 로마서 9장 14절부터 18절은 이 심오한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며,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 그리고 그분의 주권이 얼마나 완전한 질서 안에서 역사하는지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강해는 6-29절까지의 내용을 세분화한 한 것입니다.

로마서 9:6–29 강해,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가?

바울은 이 질문을 예상한 듯이 제기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9:14). 하나님의 선택이 행위 이전에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눈에 불공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μὴ γένοιτο"(메 게노이토), 즉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력한 부정의 표현입니다. 이는 단지 하나의 해석의 여지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단단히 선을 그은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결코 변덕이나 감정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긍휼에 근거하며, 그 안에는 불의가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단순히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뜻은 피조물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우리가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 뜻이 거룩하고 의롭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그는 모세의 사건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선언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이는 출애굽기 33장 19절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금송아지 사건 후 다시 언약을 회복하시며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극심한 반역을 저질렀지만, 하나님은 완전한 심판이 아닌 긍휼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기 선언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실 자를 직접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긍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격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푸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다'(ἐλεέω, 엘레에오)는 헬라어는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자비의 표현입니다. 이는 은혜의 행동이며,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은혜입니다.

 

원하는 자나 다른 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바울은 이어지는 16절에서 이 진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다른 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이 말씀은 구원의 주체가 철저히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인간의 바람이나 노력, 결단,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하는 자'(θέλοντος, 델론토스)와 '다른 박질하는 자'(τρέχοντος, 트레콘토스)는 인간의 의지와 수고를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인간적 요소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τοῦ ἐλεοῦντος θεοῦ, 투 엘레운토스 테우)은 바로 그 자비를 베푸시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단지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진리는 종교개혁 당시 루터와 칼빈이 일관되게 강조한 신학의 핵심이며, 모든 인간의 자랑을 부숴버리는 복음의 칼날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과 신뢰를 회복하게 됩니다.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이 사실이, 나의 선택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믿을 때, 우리는 더 깊은 감사와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바로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

이제 바울은 반대의 예로 바로를 들며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에 대해 설명합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롬 9:17).

출애굽기의 바로는 단순히 강한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세우셨고, 그의 완악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웠다'(ἐξήγειρά σε, 엑세게이라 세)는 일으켰다는 뜻이지만, 더 깊이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도록 지정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바로는 스스로의 악함으로 완악해진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그 마음이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출애굽기에는 "바로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매"와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니"라는 두 표현이 반복되며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이 긴장 속에 함께 존재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완악하게 하다'(σκληρύνω, 스클뤼노)는 단순히 감정을 차갑게 만들거나 완고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굳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애굽에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동시에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이 사례를 통해 다시 선언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금 정리하며, 인간이 결코 하나님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분의 자유로운 사랑이며, 하나님의 완악하게 하심 역시 그분의 거룩한 계획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뜻은 항상 공의롭고 완전합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침묵하고 엎드리는 경외의 태도를 요구합니다.

 

결론

로마서 9장 14절부터 18절은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 그리고 완악하게 하심이 모두 그분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진리는 인간의 자랑과 질문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히 엎드리게 만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긍휼은 우리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 앞에 감사와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해 높임받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로마서 9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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