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신약로마서

로마서 9:1–5 강해 이스라엘은 구원 받는가?

BibleMeditation 2025. 4. 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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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 왜 구원에 이르지 못했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며 율법과 언약, 예배의 특권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복음을 거부했고, 바울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구원마저 포기하고자 했는가. 로마서 9장 1절부터 5절은 복음의 비밀 앞에 선 바울의 눈물과 탄식을 담고 있다. 이 본문은 단순히 민족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의 구원 경륜과 주권적 은혜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바울의 마음, 복음의 무게를 안고

로마서 9장은 로마서 전반부의 정점인 8장을 지나면서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전환된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찬란한 선언 다음에 이어진 것은, 바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슬픔과 고통이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가 말하노라." 바울은 그저 안타까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복음의 진리 안에서 직면했고, 그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통은 단순한 민족적 애국심이나 혈통적 유대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바울은 복음의 빛 안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단절된 실상을 본 것이다. 구원은 혈통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율법을 지켰다는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진리를 그는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는 비극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

 

이 고백은 단순한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다. 구약의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 자신의 이름을 책에서 지워달라고 간청했던 것처럼(출 32:32), 바울 역시 같은 심정으로 복음을 거부한 자기 동족을 향한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단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아니라, 복음 때문에 고통받는 중보자의 자리에서 이 편지를 써 내려간다. 복음은 단순한 진리의 전달이 아니라, 영혼을 짊어진 자의 깊은 눈물과 희생 위에 전파되는 것임을 바울은 자신의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이 고백을 할 때 자신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함께 증언한다고 말한다. 이는 단지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에서 진실하게 나오는 고백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이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것은 곧 복음의 무게를 짊어진 사도로서의 진정성이었다.

 

선택받은 민족의 신비한 특권

바울이 고통스러워한 이유는 단지 이스라엘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령한 특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롬 9:4-5) 여기서 바울은 일곱 가지의 영적 특권을 언급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 안에서 주어진 은혜의 표징들이다.

 

'양자됨'(υἱοθεσία)은 단순히 신분상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안에 있는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시고, 아버지로서의 은혜를 베푸셨다. '영광'은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성막과 성전에 충만했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실재적으로 그들 가운데 있었다는 뜻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셨다는 신비를 나타낸다.

 

'언약들'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게 주신 언약들을 포괄하며, 하나님의 변함없는 구속사의 선포다. 이 언약은 단절된 적이 없으며, 매 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계시되고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이다. '율법'은 단순한 계명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통로이며, 그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기준이었다. 율법은 은혜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은혜 아래서의 거룩한 삶을 위한 지침이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절기,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삶의 표현이었다. 예배는 단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삶의 전반적인 태도였다. '약속들'은 메시아의 도래와 구원의 성취를 내포한 장래의 소망이었다. 그리고 '조상들'은 언약의 계보를 따라 구속사의 흐름 속에 선 인물들이었다. 그 조상들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를 이끌어 가셨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언하는 거룩한 통로였다.

 

그 모든 특권의 절정은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라는 말에서 정점에 이른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사실은 그 어떤 특권보다 큰 은혜였다. '육신으로 하면'이라는 표현은 성육신의 신비를 담고 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통로가 이스라엘이었다는 사실은 이 민족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바울의 고통은 더 깊어졌다. 그토록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작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설적인 비극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패한 것인가?

이스라엘의 이러한 현실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언약은 무효가 된 것이 아닌가? 바울은 이 질문을 받아 로마서 9장 이후에서 구속사의 신학적 해설을 이어간다. 그는 선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롬 9:6)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눈에 보기엔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섭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다. 구원은 혈통이나 전통, 또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긍휼과 예정, 은혜의 역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이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로마서 9장은 단지 교리적 논쟁을 위한 장이 아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에게 거절당한 비극적 현실 앞에서 바울은 눈물로 이 장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리고 긍휼의 깊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로마서 9장은 단지 한 민족의 실패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패조차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선언은,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이 진정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전이다. 이는 이후 로마서 10장과 11장에서 더욱 깊이 있는 신학적 설명으로 이어지며, 결국 모든 민족 가운데 복음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을 밝히 드러낸다.

 

결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지만, 그 특권이 곧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복음 앞에 선 사람은 누구나,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알기에 자신의 동족을 향해 눈물로 기도하고, 복음을 위해 생명을 내던지는 삶을 살았다. 오늘 우리도 복음의 은혜 안에 있는 자로서,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향해 동일한 마음으로 중보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은 교만이 아닌 감사와 헌신으로 이어져야 할 은혜임을 기억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을 단지 지식이나 교리로만이 아니라, 바울처럼 마음을 찢으며 전할 수 있는 진정한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생명이며, 우리의 눈물과 기도, 그리고 희생을 통해 증거되어야 할 거룩한 진리이다.

로마서 9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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