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신약로마서

로마서 6:15–23 강해

BibleMeditation 2025. 4. 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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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종으로 살 것인가

로마서 6장 15절부터 23절까지는 바울의 성화 논증의 절정 부분입니다. 앞서 6장 초반에서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 따른 삶의 방식은 죄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보다 명확하게 신자의 위치를 두 가지 주인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죄의 종'이냐, '순종의 종'이냐. 이 질문은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통치권에 대한 문제이며, 누구의 권세 아래 살아가느냐에 대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죄의 종이 아닌 의의 종으로 (6:15–18)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6:15)

 

바울은 다시 한번 반문합니다. 앞절에서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말했기에, 어떤 이는 그 은혜가 죄를 가볍게 만들어 죄를 지어도 괜찮은 것 아니냐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전과 같은 단호한 어조로 선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μὴ γένοιτο). 이는 헬라어에서 가장 강한 부정 표현으로, 바울이 결코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기준을 드러냅니다.

 

이어서 바울은 종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6:16). 여기서 '내주다'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파리스테미'(παριστάνω)로, 스스로를 바치는 행위입니다. 즉, 누구에게 순종하느냐는 단순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주인의 권위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신앙적 결정입니다.

 

죄에게 순종하면 '사망에 이르고', 순종함에 이르면 '의에 이른다'(6:16). 이 이분법적 대조는 매우 명확합니다. 성경은 중립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면 의의 종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면 결국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자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6:17-18)

 

여기서 '교훈의 본'(τύπον διδαχῆς)은 복음 진리의 정형화된 틀, 곧 사도적 가르침을 뜻합니다. 바울은 단지 삶의 변화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변화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일어납니다. 단순히 감정적 열정이나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이 변화는 근본적인 신분의 전환이며, 이는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단지 죄를 멀리하는 수준이 아니라, 의를 적극적으로 따르며, 의의 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거룩함을 향한 순종의 여정 (6:19–22)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6:19)

 

바울은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비유를 통해 의의 종으로 살아야 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을 비교합니다. 과거에는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르렀다면, 이제는 지체를 '의'에게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말합니다. 이 구조는 죄의 삶이 점점 더 깊은 죄로 나아가는 것처럼, 의의 삶도 점진적으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경로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거룩함'(ἁγιασμός)은 단지 도덕적인 성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어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이는 성도의 삶이 단지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긍정적인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6:20)

 

이 구절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 오히려 의에 대해 자유로웠다는 말은, 곧 그 당시에는 의에 대해 아무 책임도 느끼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의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의를 위해 살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상태. 그것이 바로 죄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입니다. 이제는 죄에 대해서 자유롭고, 의에 대해서는 책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지금 부끄러워하는 일을 하여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그 마지막은 사망이라”(6:21)

 

죄의 삶은 열매가 없습니다. 오직 수치와 사망뿐입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영적 죽음입니다. 그러나 의의 종이 된 자는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6:22)

 

바울은 죄의 결과와 의의 결과를 선명하게 대조합니다. 죄는 사망을 낳고, 의는 거룩함을 낳으며, 그 끝은 영생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죄는 잠시 즐거워 보이나 그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때로 희생을 요구하지만, 그 끝은 거룩함과 생명입니다.

 

죄의 삯과 하나님의 선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6:23)

로마서 6장의 마지막 절은 바울의 성화론을 요약하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죄의 삯’이라는 표현은 군사 용어로, 헬라어 ‘옵소니온’(ὀψώνιον)은 군인이 받은 급여나 보상을 뜻합니다. 죄의 결과는 보상처럼 우리에게 '사망'으로 돌아옵니다. 이는 마땅한 대가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대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카리스마, χάρισμα)는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는 우리의 행위와 무관한 하나님의 전적인 호의이며, 그 선물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이 구조는 복음의 대칭 구조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죄는 일한 만큼의 대가를 주지만, 하나님은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생명을 선물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자유, 참된 주인,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결론

로마서 6장 15절부터 23절은 신자의 삶이 누구의 통치를 받느냐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죄는 우리에게 사망을 주지만, 하나님은 영생을 주십니다. 신자의 정체성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영생을 소망하는 자로서, 우리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 아래 사는 자의 참된 자유이며,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삶입니다.

로마서 6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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